사랑은 함께 삶을 헤쳐나가는 거대한 여정 같은 것
우리 시대 상실을 가장 유려하게 그려내는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10년 만의 신작 『파묻힌 거인』을 통해
기억과 망각의 딜레마를 이야기하다
“『파묻힌 거인』은 본질적으로는 제가 생각하는 사랑의 모습에 관한 책이에요. 사랑은 함께 삶을 헤쳐나가는 거대한 여정 같은 것이지요.”
(c) Jane Brown
가즈오 이시구로가 10년 만에 신작 『파묻힌 거인』을 발표했다. 맨부커 수상작 『남아 있는 나날』의 작가가 쓴 것이라고는 얼핏 연상이 되지 않는 아서 왕 이후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모험담이다. 이 작품에서는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황폐한 풍경이 가득 펼쳐지며 그 속에는 기독교도 브리튼족과 이교도 색슨족뿐만 아니라 도깨비와 기사, 안개를 내뿜는 암용 케리그가 살고 있고 이 암용의 입김이 온 땅을 망각의 안개로 뒤덮는다. 그러나 『반지의 제왕』 같은 톨킨의 땅으로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 작품은 한 노부부의 기나긴 사랑의 여정에 대한, 전쟁의 상처와 민족 전체의 기억 상실에 대한 현명하고 유의미한 문학적 탐구 과정이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사랑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이들을 통해 일종의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흔히 ‘사랑 이야기’라고 하면 떠오르는 서로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니에요. 사랑의 기나긴 여정에 관한 이야기지요. 액슬과 비어트리스는 아주 오래전에 만나 사랑에 빠지고 함께 살아왔어요. 따라서 이 책은 사랑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지난하게 싸워야 했던 긴 고투의 세월에 관한 책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동시에 이 책은 기억과 망각에 관한 작품이기에, 이런 물음들이 생기게 돼요. 결혼생활에서 함께 나눈 기억은 어떤 역할을 할까? 같은 일에 대해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불편한 어두운 기억은 어떻게 해야 하나? 사람들은 관계의 이런 측면들을 과거 속에 그냥 묻어두는 쪽을 선호해요. (이건 민족이나 국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그러고 나면 물음이 떠오릅니다. 이런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내면 사랑이 무너질까? 이 기억들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과연 진정한 사랑일까?
저는 이 점이 액슬과 비어트리스의 딜레마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잃어버린 기억을 본능적으로 다시 되찾고 싶어 하고 그 기억 속에서 어떤 사실이 밝혀지더라도 충분히 견뎌낼 만큼 자신들의 사랑이 강하다고 확신하고 있어요. 하지만 작품의 뒤로 갈수록 이들은 의심이 들기 시작하고 두려움에 휩싸이지요. 『파묻힌 거인』은 본질적으로는 제가 생각하는 사랑의 모습에 관한 책이에요. 사랑은 함께 삶을 헤쳐 나가는 거대한 여정 같은 것이지요.
소재의 다양성과 주제의 지속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의 작품들에 대해 흔히 이야기되는 ‘소재의 다양성’이라는 건 주로 ‘배경’이나 ‘장르’와 관련된 부분 같아요. 하지만 제 주제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볼 때 기억 또는 기억과 망각의 딜레마에 관한 거예요. 분명 초기 작품들을 보면 선의의 의도를 가진 이들이 삶의 과정에서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헛되이 써버렸다고 생각하는 면들이 있어요. 이러한 점은 『파묻힌 거인』에도 여전히 들어 있지요. 제가 생각하기에 액슬은 제 작품에 나오는 전형적인 인물로,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려고 하지만 일정 시점에 이르게 되면, 아, 난 결국 나쁜 일에 기여했던 거군, 이렇게 생각하고는 그 일을 지워버리려 해요. 그러니까 작품을 좀 더 깊이 파고들어가면 이러한 지속성이 들어 있는 거지요. 주제나 정서적인 면에서 그것이 저의 기본적인 주제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500년 즈음에 영국의 풍경이 어떤 모습이었는가 하는 점은 결코 저의 주제가 아니에요. 제에게 배경을 선택하는 문제는 어떤 서술 방식으로 쓸 것인지, 화자는 누구로 할 것인지, 어떤 시점을 택할 것인지 하는 범주에 속할 뿐이에요. 저의 경우 배경 선택 문제나, 심지어는 장르, 저는 장르 문제에 대해서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편이지만, 그런 장르조차도 모두 이야기가 생생하게 살아나도록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에요.
현대의 전쟁과 분쟁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그런 사건들이 실제로 제 작품에서 엄밀한 의미의 주제를 이루지는 않지만 흥미를 끈 것은 사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1989년 냉전이 종식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유고슬라비아의 붕괴를 목격했어요. 티토의 공산주의 체제에 의해 유지되던 평화와 통일이 깨지자 이 모든 것들, 아마도 짐작건대 그동안 묻혀 있던 기억과 묵은 원한들이 표면으로 올라와 분출되었던 거지요. 우리가 이를 깨닫기 전에 유럽에 다시 집단수용소가 등장했고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1992~19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유엔이 ‘안전 지역’으로 선포한 피난민 주거지인 스레브레니차를 세르비아군이 침공해 약 7500명의 이슬람교도들을 학살한 사건-옮긴이)은 제2차 세계대전의 어떤 사건을 닮아 있었어요. 르완다 학살은 그 정도로 비슷하지는 않지만 그 역시 당시에 벌어진 또 하나의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고요.
두 사건 모두를 지켜보면서 우리 중 많은 이가 이런 물음을 던졌던 것 같아요. 함께 나란히 살았던 이들이 어떻게 갑자기 서로를 불태우고 학살할 수 있을까? 분열은 당연히 어느 정도 늘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너무 충격적이었던 것은 종족의 기억을 이용하여 사람들 각자가 이웃에게 개인적인 복수욕이 있다고 확신을 갖게 되는 과정이었어요.
그것이 제게는 일종의 도화선이 되어 사회적 기억의 문제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아울러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개인들의 문제에 대해 그때까지 제가 써왔던 책들과 이 사회적 기억의 문제가 어떻게 연관되는지 생각하게 되었지요.
서부극과 사무라이, 원탁의 기사에 대한 애정을 말해주신다면요?
제가 처음 영국으로 왔을 때가 다섯 살이었어요. 부모님 두 분 모두 영어 실력이 좋지는 않고, 특히 어머니는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제 식대로 영어 공부를 해야 했는데, 주로 집에 오면 좋아하는 카우보이 물을 보는 식이었죠. 그 시절에는 텔레비전이 온통 서부극이었어요, 미국 서부극이요. 일본 아이였던 저는 뭐가 뭔지 무척 혼란스러웠지요.
당연히 전 <보난자>나 <역마차>에 나오는 서부 미개척지 사람들의 말투와 영국 런던 인근에 사는 사람들의 말투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했어요. 그래서 등굣길에 아이들을 만나면 “어이!” 같은 말을 하곤 했죠. 아마 아이들은 무척 놀랐을 거예요. 그때부터 있었던 서부극에 대한 애정은 줄곧 이어졌는데, 아마도 그런 서부극 속에서 어릴 때 듣고 자란 사무라이 이야기의 어떤 점을 본 게 아닐까 싶어요. 이 책에 나오는, 아서 왕의 마지막 기사로 이제 노년을 맞이한 가웨인 경은 그런 애수적인 서부극의 인물과 비슷해요. 지난 시대의 늙은 총잡이요, 여전히 광활한 하늘을 배경으로 홀로 말을 타고 가는 사람 말이에요.
창작 수업과 작곡에 대한 경험이 소설가로서의 작가님께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30년 전 창작 수업을 들었어요. 영국에서 처음 시작된 강의였지요. 전체적으로 핵심은, 결국 창작은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12개월의 기간은 자신이 정말 작가인지 아닌지 발견하는 시간이었지요. 나 자신이 작가라는 대단한 환상 같은 것은 품지 않은 채 그곳에 갔는데 처음 들어갔을 때에는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심지어는 소설을 쓰고 있을 때에도 제 마음의 한 부분은 여전히 작곡가로 남아 있어요. 제가 쓰고 있는 이야기들과 젊었을 때 썼던 곡들이 서로 겹쳐지는 커다란 공통점도 있는 것 같고요. 소설가로서의 저에 대해 여러분이 이른바 저의 ‘스타일’이라고 일컬을 법한 측면의 많은 부분이 작곡가 시절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돼요. 노래는 본질적으로 일인칭, 외로운 일인칭 이야기이고, 이를 청중에게 들려주는 거잖아요. 최근 작품에 이르기까지도 저는 제 작품의 대부분을 그렇게 바라보았어요.
일인칭 시점을 포기한 것에 대해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가웨인의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진 두 챕터와 작품 맨 마지막에 뱃사공의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진 한 챕터가 들어 있긴 하지만 그 세 군데를 제외하면 『파묻힌 거인』은 액슬 또는 고아 소년 에드윈의 삼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어요. 책 전반에서 일인칭 시점을 쓰지 않기로 결정했던 건 작품 속에서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사회적 기억의 문제를 다루고 싶었던 나의 욕심과 모두 관련이 있어요. 가령 『남아 있는 나날』이나 『나를 보내지 마』 같은 작품의 경우는 책의 모든 세계가 한 인물의 머릿속에 들어 있지요. 하지만 민족과 그들의 집단 기억에 관해 쓰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느꼈어요. 처음 시작부터 보다 넓은 시야를 갖기 위해 일인칭 시점을 벗어나야 한다고 여겼지요.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영향을 받은 책과 작가는 무엇이고 누구인지요?
샬롯 브론테의 두 작품 『제인 에어』와 『빌레트』가 특히 일인칭 시점의 사용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큰 영향을 주었어요. 수줍은 방식으로 일인칭 화법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는데, 화자는 깊은 내면의 감정을 털어놓는 것처럼 보이고 독자는 그녀가 이제껏 뭔가 중대한 것을 감춰왔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되는 방식이지요. 지금은 그때만큼 경외감을 갖지는 않지만 십대 시절 가장 좋아했던 작가는 도스토옙스키였어요. 그리고 우리 세대의 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는 록 음악에서 책으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했지요. 영국에서 성장하는 동안 저는 줄곧 미국 록 음악을 들었기 때문에 미국으로 건너가 히치하이킹으로 전국을 여행하는 게 저의 꿈이었어요. 짐작건대 유일하게 그러한 정신을 지닌 것 같은 책이 케루악의 『길 위에서』가 아니었던가 싶네요. 그 책은 제가 글을 쓰기 시작하기 한참 전에 나왔지만, 책도 꽤나 멋진 것이라는 생각을 심어준 작품이에요.